[063] D에게 보낸 편지 - 앙드레 고르

2017. 1. 13. 15:56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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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에게 보낸 편지 - 앙드레 고르


앙드레 고르는 ‘배반자’라는 책에서 아내를 나약하게 표현한 것이...몇 십년간의 집필 활동 중 아내에 대한 글을 (제대로)쓰지 않은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처음엔 왜 이렇게 미안해 하는 걸까 의아했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일단 그의 어지럽고 무질서한 청년기는 도린을 만나며 조금씩 차분해지고 정리돼 간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나는 '다른 곳에', 내게 낯선 곳에 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 부족함을 메워주는 타자성(他者性)의 차원으로 나를 이끌어주었습니다. 정체성이라는 것을 늘 거부하면서도 결국 내 것이 아닌 정체성들만 하나하나 덧붙이며 살아온 나를 말입니다.

‘케이’로 불리는 당신. ‘당신’을 내게 줌으로써 ‘나’를 내게 준 사람에게.


 

정리를 넘어서 그녀는 그에게 본질이 된다.

도린은 앙드레 고르를 ‘앙드레 고르’ 자체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준, 도린 자신 삶의 소명이 앙드레 고르를 앙드레 고르로 살 수 있게 하는 것인냥 살았던 그녀이다. “지금도다 더 대접받고 살아야 하는 사람” 이라며 앙드레 고르를 항상 응원하고 때론 질타하며 그가 중심을 잃지 않게 잡아준 사람이 도린 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본질적인 단 하나의 일은,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썼지요.

당신이 본질이니 그 본질이 없으면 나머지는, 당신이 있기에 중요해 보였던 것들마저도, 모두 의미와 중요성을 잃어버립니다.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앙드레 고르 자신의 본질이 부인 도린 이라는데 어떤 설명이 더 필요할까 싶다.

그런 그녀가 아프다. 삶 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앙드레 고르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미안했을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 겁니다. 캐슬린 페리어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세상은 텅 비었고, 나는 더 살지 않으려네.'

그러다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당신의 숨소리를 살피고, 손으로 당신을 쓰다듬어봅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그는 편지내내 도린과의 작은 추억까지도 잊지 않으려고 상세하고도 감각적으로 써내려 갔다.

우리가 그때 무얼했는지 누가 있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래서 감정이 어땠는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기록하려는 앙드레 고르의 의지가 안타까울만큼 마음이 아팠다.

그의 본질이라던 도린을 먼저 떠나 보낼 수 없다며 납골함을 받아들지 않을거라며 다음 생에도 함께 하자며 끝낸 이 편지의 끝은 어떻게 됐을까?

앙드레 고르는 이 책을 쓴 다음 해에 시골집 침대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을 했다고 한다. 아내가 자신의 본질이기에 아내 없는 앙드레 고르는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던 것 같다.

상대를 통해 내 자신을 알게되고, 상대가 자신의 본질일 수 있는, 상대가 존재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관계의 부부가, 사랑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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