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2017. 1. 13. 16:46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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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죽기 전까지 아내와 주고 받았던 4년 간의 편지와 그의 작품이 함께 실려있는 책.
읽는 내내 '아내를 많이 사랑했구나'라는 생각 보다는 그의 삶이 참 쓸쓸하고 서글프게 느껴진다.

 

 

위 그림은 이중섭 작가의 ‘흰소’라는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아니라도) 한번은 봤거나 봤음직한 그림일 것이다. 소의 모습도 역동적이고 선도 강해 작가의 성품 또한 남성적이고 강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책 속의 이중섭은 집착이라 할 만큼 아내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외로운 사람 이었다.


 

책을 처음 읽을 땐 아내에 대한 애정 표현이 직접적이고 적극적이어서 살짝 오글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읽을수록 그 집착에 가까운 답장요구가 ‘외로움’처럼 느껴졌고 이중섭 이라는 ‘사람’은 어떤이였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책을 읽는 중간 이중섭 작가에 대한 검색을 해봤다.

그는 1916년 평안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배고픔을 모르고 자라다 공부를 위해 외가에서 타지 생활을 시작했고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작품공부와 활동에 들어간다. 그리고 원산에서 일본인 아내 야모모토와 1945년 결혼을 하고 이 사이에 2남을 두었다.

하지만 북한의 공산 치하가 시작되고 자유로운 작품활동이 어려워지자 원산을 탈출하여 제주도를 거쳐 부산으로 거쳐를 옮기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일본 동경으로 옮겨가고 이중섭만이 한국에 남아 작품활동을 계속한다. 이렇게 가족과 떨어져지난 4년여거나 아내와 주고 받은 편지가 책으로 엮여져 나온게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다.


 

어떠한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어떤한 젊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열렬한 애정만한 애정이 또 없을 것이오. 일찍이 역사상에 나타나 있는 애정 전부를 합치더라도 대향과 남덕이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참된 애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게요. 그것은 확실하오. 당신의 멋지고 훌륭한 인간성이 대향의 사랑을 샘처럼 솟게 하고, 화산처럼 뿜어 오르게 하고, 바다처럼 파도치게 하는 것이오.


 

빨리빨리 아고리의 두 팔에 안겨서 상냥하고 긴긴 입맙춤을 해주어요.

언제나 상냥한 당신 일로 내 가슴은 가득 차 있소. 하루빨리 기운을 차려 내가 좋아하고 좋아하는 발가락 군을 마음껏 어루만지도록 해주시오. 아! 나는 당신을 아침 가득히, 태양 가득히, 신록 가득히, 작품 가득히, 사랑하고 사랑하고 열애해 마지않소.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세계 속에 올바르게,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으로 자처하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조국을 떠나는 것은 … 더욱이 조국의 여러분이 즐기고 기뻐해줄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여 다른 나라의 어떠한 화공에게도 뒤지지 않는 올바르고 아름다운, 참으로 새로운 표현을 하기 위하여 참고하지 않으면 안 될, 여러가지 일들이 있소. 세계의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이 최악의 조건하에서 생활해온 표현, 올바른 방향의 외침을 보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아내를, 진심으로 모든 걸 바쳐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일을 할 수 없소. 독신으로 제작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고리는 그런 타입의 화공은 아니오. 자신을 올바르게 보고 있소.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으 밝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나의 태현아 건강하겠지, 너의 친구들도 모두 건강하니? 아빠도 건강하다. 아빠는 전람회 준비에 물두하고 있다.

아빠가 엄마, 태성이, 태현이를 소달구지에 태우고 아빠가 앞에서 황소를 끌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함게 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만 몸 성해라.


 

“나는 세상을 속였어! 그림을 그린답시고 공밥을 얻어먹고 놀고 다니며 훗날 무엇이 될 것처럼 말이야. 남들은 세상과 자기를 위하여 저렇듯 열심히 봉사하고 바쁘게 돌아가는데 나는 그림만 신주 단지처럼 모시고 다시며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동경에 그림 그리러 간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남덕이와 애들이 보고 싶어서 그랬지.”

중섭은 그날부터 일체 음식을 거절하고 병원에 드러누웠다.

그가 심신의 막다른 피로와 절망 속에서 쓰러졌을 때 나온 이 말의 배경에는 그의 저러한 말 못할 고통이 스며 있었고 또 그래서 그 결론으로 식음을 전폐하는 절단에 나아간 것이다.



 

그는 조국을 사랑했고 가족을 사랑했지만 조국을 떠날수도 가족을 떠날수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중섭 자신이 생각 하기에 가족보다는 조국이 자신을 더 필요로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면 어수선한 나라 안에서 불안한 국민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위로 받길 원했으니 말이다. (사실...먹고살기 바쁜 국민들이 그림 볼 여유가 있었겠냐 만은 그 자신은 그렇게라도 나라에 힘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길 바란 것 같다.)


 

조국에 있으면서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살고자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고, 몇번이고 일본에서 가족과 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던 것 같다. 실제로 한번은 집까지 구하고 일본에 어렵게 갔지만 얼마되지 않아 다시 조국으로 돌아왔다.

어려운 나라를 외면하고 혼자 호의호식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번 가족과의 삶을 생각하며 일본행을 꿈꾸며 여러개의 전시회를 연달아 준비했지만 그로인해 몸은 더 쇠약해져 갔고 미수금이 많아 수입도 크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은 그가 외면해지 못했던.... 가족과의 삶을 가로 막았던 조국에서 숨을 거뒀다.


 

어린 나이에 외가에서 혼자 지냈고 작품활동을 위해 가족을 두고 남으로 내려왔고, 조국을 위해 아내와 아이들을 타국으로 떠나 보내야 했던 이중섭의 삶은 외로움과 그리움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정신쇠약과 건강이상으로 세상을 떠난 이중섭에게 가족이 있었더라면 그의 인생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린 조금 더 많은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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