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쥐 쥐스킨트

2016. 11. 22. 15:38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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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깊이에의 강요 - 파트리쥐 쥐스킨트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 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아름다움까지 겸비했던 여류 작가는 기사 한토막으로 인해 자신을 망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녀를 그렇게 망친 것이 정말 기사 때문이었을까?

자존심 또는 자존감의 문제는 아니었을까?


그녀에게 "깊이"를 강요한 것은 기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깊이"는 그녀 작품에 국환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류 작가는 작품의 깊이만을 찾아 오래된 그림과 서적만을 뒤적이다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의 깊이, 신념의 깊이가 없었던 건 아니었을까?

결국 그녀가 찾아야 했던 건 오래된 그림도 고서적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어야 했다.

만약 그녀에게 그 깊이가 있었더라면 기사 한토막, 다른 이들의 수근거림 따위는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기사를 쓴 기자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지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 이라는 표현이야말로 이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남들의 이목에 집중하여 그들이 우러러볼 나를 만드는 자존심을 세우기 보다 남들이 뭐라하든 내가 나 자신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자존감만이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다.

 


결국 그녀가 찾아야 했던 건 오래된 그림도 고서적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어야 했다.
만약 그녀에게 그 깊이가 있었더라면 기사 한토막, 다른 이들의 수근거림 따위는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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